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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GONGJU CITY

2022.01

이달의 공주 역사인물

금사 류충걸

  • 12월의 역사인물 금사 류충걸(錦沙 柳忠傑, 1588 ~ 16655)은 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충과 효를 몸소 실천한 문신이자 진주류씨의 공주 지역 입향조인 인물입니다.
  • 진주류씨와 공주와의 인연은 선생이 공주로 내려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선생은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광해군의 폐모살제에 분개하며 한양을 떠나 공주로 낙향하였습니다.
  • 선생이 은거지로 공주로 선택한 것은 선생의 외가 및 처가와 큰 관련이 있습니다. 선생의 어머니인 전주이씨는 전주이씨 정간공파* 출신으로 정간공파는 장기면 송원리에 터를 잡고 세거하고 있었습니다.

    선생의 외증조부는 2021년 11월의 역사인물인 한재 이목의 아들이자 전주이씨 정간공파의 공주 입향조인 청백리 이세장(李世璋, 1497~ 1562)이다.

  • 또한 선생의 부인 능성구씨의 가문 역시 의당면 중흥리에 세거하고 있었으며, 선생의 고모부 집안이 탄천면에 세거하고 있었으므로 혼탁한 정계를 떠나 은거할 곳으로 이미 인연이 있던 공주를 선택한 것입니다.
  • 선생이 송원리에 입향한 이후 형제와 후손들은 대교천을 따라 세거지를 마련하였습니다. 아들들은 장기면에 모여 살았고, 동생 신걸은 반포면에, 또 다른 동생 지걸은 의당지역에 정착하였습니다.
  • 현재 세종시 장군면 대교리에는 선생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류충걸 묘소 및 신도비*가 남아있어 선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류충걸 묘소 및 신도비 : 선생의 묘와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으로 선생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前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에 있다. 신도비의 글은 1687년(숙종 13) 송시열이 짓고 비문은 서화로 유명한 김수항이 썼다. 1997년 6월 5일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6로 지정된 후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53호로 지정되었다.

  • 선생의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금강의 모래를 뜻하는 금사(錦沙)이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보좌하였으며 노량해전에서는 전사한 이순신 장군을 대신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류형(柳珩)의 아들입니다.
  • 선생은 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충과 효를 최대의 덕목으로 여기며 실천하였는데 1613년(광해군 5) 정조·윤인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주장하자 그들의 죄를 강경히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처벌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후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인목대비가 폐서인(廢庶人)으로 강등되고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이에 분개하여 대과에 응시하지 않고 외가인 공주로 낙향하였습니다.
  •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비로소 벼슬에 나갔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청나라와의 화의가 성립되자 의병을 해산하였습니다.
  • 이에 1637(인조 15)에는 적을 물리치지 못한 죄를 스스로 아뢰고 벌을 자청하며 설욕책을 상소하였는데, 호서 유학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초려 이유태 선생은 선생의 상소문을 읽고 선생의 충의심에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 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공주로 돌아와 1665년(현종 6) 79세의 일기로 타계하였으며, 저서로는「금사실기(錦沙實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 묘소는 세종시 장군면 대교리에 있고 1827년(순조 27) 후손들이 공주 장기면 송원리(現 세종시 한솔동)에 금호서사(錦湖書社)를 건립하고 선생과 증조부 류진동, 아버지 류형을 배향하였으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2년 공주 장기면 하봉리(現 세종시 장군면 하봉리)에 충렬사(忠烈祠)를 다시 세우고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 또한 선생의 집안은 명망 높은 무신 가문입니다. 선생의 할아버지 류용, 아버지 류형을 비롯하여 선생의 후대에도 류효걸, 류신걸, 류혁연, 류비연, 류상량, 류상필 등 무과에 급제한 사람만 46명이며 이 중 군영대장이 4명, 통제사가 8명으로 진주류씨 가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공주시는 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충과 효를 몸소 실천한 문신이자 진주류씨의 공주 지역 입향조인 류충걸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자 2022년 1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카드뉴스

2022 1월 금사 류충걸1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2 1월 금사 류충걸2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2 1월 금사 류충걸3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2 1월 금사 류충걸4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2 1월 금사 류충걸5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2 1월 금사 류충걸6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2 1월 금사 류충걸1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2 1월 금사 류충걸2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2 1월 금사 류충걸3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2 1월 금사 류충걸4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2 1월 금사 류충걸5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2022 1월 금사 류충걸6 - 하단에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언론보도

  • 공주시, 2022년 1월의 역사인물 ‘금사 류충걸’ 선정
  • 공주를 고향 삼은 진주류씨의 공주 입향조
  • 자세히보기바로가기
  • 공주시, 내년 1월의 역사 인물 ‘금사 류충걸’ 선정
  • 市, 공주를 고향 삼은 진주류씨의 공주 입향조 류충걸 선정
  • 자세히보기바로가기
2022 1월의 공주 역사인물 포스터 이미지로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참고해주세요
2022 1월의 공주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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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변 진주류씨의 시조가 되다. 금사 류충걸 1588~1665
  • 자는 신백, 호는 금강의 모래를 뜻하는 금사로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을 보좌하였으며, 노량해전에서는 전사한 이순신 장군을 대신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류형(1566-1615)의 아들이다.
  •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인목대비가 폐서인으로 강등되고 서궁으로 유폐되자 이에 분개하여 대과에 응시하지 않고 외가인 공주로 은거하였다가 인조반정 이후 벼슬길에 나아갔다.
  • 류충걸이 공주로 입향한 후 형제와 후손들이 대교천을 따라 세거지를 마련하였으며, 대대로 걸출한 무신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 후손들이 1827년 (순조 27) 공주 송원리(현 세종시 한솔동)에 금호서사를 건립하고 류충걸과 증조부 류진동, 아버지 류형을 배향하였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 1972년에 충렬사 (현 세종시 장군면 하봉리)를 다시 세우고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