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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GONGJU CITY

2022.10

이달의 공주 역사인물

충민공 윤각

  • 10월의 역사인물 윤각(尹慤, 1665 ~ 1724) 선생은 문무를 겸비한 조선후기의 뛰어난 무신이자 백두산 정계비 건립에 공을 세웠으며, 공주를 고향으로 삼은 함안윤씨의 공주 입향조인 인물입니다.
  • 선생의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여성(汝誠), 호는 창동(蒼東)으로 1697년(숙종 23) 형인 윤원(尹愿)과 함께 공주 요당(蓼塘, 現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공주와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 1699년(숙종 25) 무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선생은 이후 길주목사, 삼도구순통제사, 총융사, 한성부좌윤, 병조참판 등 지방직과 중앙직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 선생은 군의 기강을 확립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는데 노력하였으며, 무관이었지만 책을 가까이하고 사려가 깊어 백성들을 대함에 있어 공정하여 많은 백성들이 선생을 따랐다고 합니다.
  • 특히 1712년(숙종 38)에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백두산 남쪽 산천의 형태를 정확하게 조사하여 백두산 정계비 건립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이를 통해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 선생은 1721 ~ 1722년에 걸쳐 일어난 신임사회(辛壬士禍)* 때 역모지원금을 지원하였다는 무고로 인해 유배형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복(自服)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 후유증으로 인해 1724년(경종 4) 60세의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 * 신임사화 :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延礽君, 후의 영조)의 왕세제 책봉문제로 인해 충돌한 사건으로 많은 노론이 소론에 의해 숙청당하였음.
  • 그러나 영조 즉위 후 신임사화를 소론 측의 무고라고 판정한 1725년(영조 1)의 을사처분(乙巳處分)으로 인해 선생은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병조판서를 증직받았습니다.
  • 1783년(정조 7)에는 조정으로부터 충민(忠愍)의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1805년(순조 5)에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하사받아 부조묘(不祧廟)*인 충민사(忠愍祠)*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 * 부조묘 :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으로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 * 충민사 : 윤각 선생을 모신 부조묘(不祧廟) 사당으로 1805년(순조 5) 조정으로부터 불천지위(不遷之位)를 하사받아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종유사(宗儒祠)라고 불렸으나, 2009년 중건하면서 충민사로 개명하였다. 2022년 10월 공주시 향토문화유적으로 지정되었다.
  • 1824년(순조 24)에는 의당면 월곡리에 있던 요당서사(蓼塘書社)에 배향되었습니다.
  • 한편, 선생의 부인인 광주김씨는 선생이 별세한 이후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고 통곡하였으며 1725년 선생이 신원된 이후 죽음으로 남편을 따르기 위해 단식하여 별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절개를 인정받아 1725년 조정으로부터 열녀 명정을 하사받게 되었습니다.
  • 현재 의당면 월곡리에는 선생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선생의 행적과 관련된 충민사와 광주김씨 열녀 정려* 등이 남아 있어 선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 광주김씨 열녀 정려 : 윤각의 부인 광주김씨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로 1725년(영조 1) 조정으로부터 명정(銘旌)을 하사받아 건립되었다. 1997년 6월 5일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유형 제15호로 지정되었다.
  • 공주시는 문무를 겸비한 조선후기의 뛰어난 무신이자 백두산 정계비 건립에 공을 세웠으며, 공주를 고향으로 삼은 함안윤씨의 공주 입향조인 충민공 윤각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자 2022년 10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카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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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 공주시, 10월의 역사 인물 '충민공 윤각' 선정
  •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무신이자 함안 윤씨의 공주 입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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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의 공주 역사 인물에 '충민공 윤각'
  • 市, 조선 후기 뛰어난 무신이자 백두산 정계비 건립에 공을 세운 윤각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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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월의 공주 역사인물 포스터 이미지로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참고해주세요
2022년 10월의 공주 역사인물 공주시 로고 백두산을 국토의 경계로 삼는데 공을 세우다 충민공 윤각
  • 윤각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함안, 자는 여성 호는 창동으로 1697년 형인 윤원과 함께 공주 요당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공주와의 인연을 맺었다.
  • 1699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1712년에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백두산 남쪽 산천의 형태를 정확하게 조사하여 백두산 정계비 건립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이를 통해 조선과 천나라의 국경을 확립하게 되었다.
  • 그러나 1721~1722년에 일어난 신임사화때 역모를 지원하였다는 무고로 인해 평안도 삼화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여러차례의 고문으로 1724년 별세하였다
  • 이후 1725년 윤각의 억울함이 밝혀지면서 관작이 회복되어 병조판서로 증직되었고, 1783년에 충민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824년에는 공주의 요당서사에 형 윤원과 함께 배향되었다.
  • 1805년에 부조묘를 하사받아 의당면 월곡리에 부조묘를 건립하였으며, 부조묘의 신위는 2022년 10월에 공주시 향토문화유적으로 지정되었다.
  • 현재 의당면 월곡리에는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선생의 행적과 관련된 충민사와 부인 광주 김씨 열녀정려 등이 남아 있다.